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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 중 처서(處暑)에 알고 가는 연산군과 김처선 이야기

by 허니꿀 2022.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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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는 24절기 중 하나로 더위가 수그러드는 시기를 말한다. 선조들의 지혜 혹은 경험에 의한 추론이 놀라울 정도이다. 실제로 며칠 전부터 저녁에는 제법 싸늘한 바람이 불어 문을 닫고 선풍기도 끄고 자고 있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 때는 '처서'를 '조서'라고 불렀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세종 시절 내시가 되어 이후 문종 때 유배되었다가 다시 귀양이 풀리고 되돌려졌다가 금성대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또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는 등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세조 때 다시 복직되었으나 세조에게 미움을 받아 자주 곤장을 맞았다고 한다. 성종 때에 대비를 치료한 일로 자헌대부에 올라갔다.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 연산군의 시종이 되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이어지자 김처선이 직언을 올렸다가 곤장 100대를 맞고 쫓겨났다.

 

혹시 민속촌이나 역사 체험 시설에서 곤장을 직접 들어본 적 있는가? 제법 묵직하여 때리는 이도 지쳐서 쓰러진다고 한다. 사실상 곤장행은 사형과 비슷했다고 한다. 한 대 한대가 엉덩이의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쌨다고 하니 곤장 100대를 맞았으면 거의 초주검 상태로 끌려 나갔을 것이다. 

 

수개월이 지난 후에야 겨우 몸을 추스르게 된 김처선은 다시 연산군을 찾아가 정말 마지막임을 예감한건지 가족들에게 이번에 궁에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입궁했다. 

 

1505년 연산군이 처용희를 추며 방탕하게 놀고 있는 곳을 찾아 김처선이 술을 먹고는 취기에 (두려움을 이기고자 마신 술인지 술김에 한 말인지)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도 대강 통했는데, 고 금을 통틀어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간언하였다고 한다.

 

김처선이 한 이 말에 노한 연산군은 직접 김처선에게 활을 쏜 뒤 양다리를 자르고 양 팔도 자르고 혀도 잘랐다.

그 당시 둘이 대화는 다음과 같다.

 

일어나 걸으라! 어명이다. 걸으라!

상감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어 다닐 수 있소이까?

 

화가 끝까지 차오른 연산군은 김처선을 죽이고 그의 양자 이공신도 죽이게 된다. 7촌 관계에 있던 이들도 벌하고 김처선의 부모의 묘도 파 해쳤다. 또한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가는 처(處) 자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처서가 아닌 조서로 바뀌었다고 한다. 

 

즐겨 추던 처용무의 이름도 풍두무로 바꾸고 과거 시험에 '처'자를 썼다고 합격 취소시켜버리기도 했다. 이 정도면 '처'자에 대한 분노가 부모를 해한 원수를 대하는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일개 내시가 감히 왕에게 폭언을 했다는 것은 왕권에 대한 큰 도전이고 이를 가만 놔둘 수 없었던 것 같다. 이후 중종도 김처선의 행적을 기리자고 하는 상소를 모두 무시하고 '술 먹고 주정 부리다 죽은 건데 무슨 공신인가'라고 했다. 중종 입장에서는 마찬가지로 왕권 강화에 김처선 같은 존재는 해가 된다고 본 것이다.

 

<왕과 비>, <왕과 나>, <왕의 남자> 등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자주 다뤄진 내용이다.

 

공길: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장생: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 왕의 남자 -

2005년 영화임에도 공길과 장생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재밌게 봤었나 보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공신들에게 시달리는 연산군을 달래주기 위해 김처선이 부른 이들이 광대(공길과 장생)들이었다. 이준기 포스터가 인기였다 한다. 

 

참고 : 나무위키, 조선왕 시크릿 파일(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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