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내용에 이어 숙종에서 경종, 그 뒤를 잇는 영조, 정조까지 다뤄보겠다. 또한 왕의 묘호인 조와 종의 차이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려 한다.
세종과 세조, 뭐가 다른걸까
세종, 세조 같이 우리가 흔히 왕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을 '묘호'라고 하는데 왕 승하 후 종묘에 모실 때 붙이는 이름이다. 왕이 어떤 업적이 있느냐에 따라 효종, 인종, 문종 등 효심이 깊거나, 인자했다거나,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거나 등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후손인 우리 입장에서는 당시에는 그저 아녀자들이나 쓸 거 같았던 '언문'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으뜸으로 친다. 하지만 묘호로 본다면 세종대왕은 그저 덕이 많았던 세'종'이오 세조는 건국하거나 국가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왕에게 붙여지는 세'조'이다.
영화 <관상>을 이야기할 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왕이 된 이야기를 했었는데, 세조의 아들인 예종이 아버지의 업적에 대해 말하길, 단종을 몰아내고 나라를 새로 세우는 것과 같은 공이 있으니 '조'를 붙여야 한다고 했다. 왕권 강화나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숙종 (인현왕후, 장희빈, 숙빈 최씨) - 경종, 영조
숙종에게는 총 4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째 부인인 인경왕후는 천연두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다음으로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된다.
서인 세력인 인현왕후 (자녀 없음)
인현왕후는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 쪽 사람이었다. 하지만 숙종은 후궁인 장옥정을 더 가까이하고 인현왕후는 멀리 했다. 그런 이유에선지 인현왕후와 숙종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후궁이었던 장옥정이 왕의 아이를 잉태하고 왕자를 낳아 장희빈이 된다. (빈은 후궁 서열 1위를 뜻한다.)
남인 세력인 장희빈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남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이를 이용하여 숙종은 기득권이었던 서인들을 몰아낸다. 숙종을 위해 궁에서 쫓겨났던 장옥정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인 (제 무덤을 판 격이었다.) 인현왕후는 폐비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다.
장희빈은 조선실록에서 유일하게 얼평(얼굴 평가)이 된 여인이다.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데다 왕자까지 낳았으니 참으로 기세 등등했을 것이다.
그런데 남인들의 정치 능력이 조금 떨어졌나 보다. 실망한 숙종은 다시 서인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인현왕후 또한 왕비로 돌아오고 장희빈은 다시 희빈의 자리로 내려간다.
노론 세력인 숙빈 최씨 (영조의 어머니) VS 서론 세력의 경종
숙종은 후궁인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는다. 장희빈에 대한 마음도 멀어져 숙빈 최씨가 왕의 총애를 받게 된다. 결정적으로 인현왕후 사후 숙빈 최씨의 밀고로 장희빈이 사당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만들었다는 게 밝혀 진다. 많은 드라마에서 장희빈이 화살로 인현왕후의 초상화를 마구 쏘아대는 장면이 나온다. 역사적 사실이니 부정할 순 없지만 인현왕후 밑에서 궁궐 생활을 했던 점, 숙종의 말을 잘 들었던 숙빈 최씨의 증언으로 장희빈의 운명이 결정지어졌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후 숙종은 궁녀가 왕비가 되는 것을 막는 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장희빈은 사사되고 경종은 이 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훗날 숙종의 견제까지 받으며 우울증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숙종을 이어 왕위를 물려받긴 했으나 슬하에 자녀도 없는 데다가 동생인 훗날의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 세력과 자신을 지지하는 서론 세력 사이에서 고통받다가 쓰러져서는 며칠 만에 죽었다. 이를 두고 독살당했다는 말도 있으나 밝혀진 바는 없다.
영화 <사도> <역린>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숙종 역을 맡았던 유아인이 사도세자가 되었다. 아버지인 영조는 송강호가 맡았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의 신분 문제, 조선 최초로 왕세자가 아닌 경종의 동생인 왕세제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약했다. 그럼에도 영조는 조선 왕들 중 최장 집권을 했고 또한 장수했다.
정실부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왕자가 태어나는 데 바로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의 '사도'는 생각 사, 슬퍼할 도로 영조가 직접 지었다. 자신의 손으로 한여름 뙤약볕에 쌀뒤주에 아들을 갇혀 죽게 만든 비정한 아버지인 영조는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영조는 돌이 겨우 지난 아이를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고 신하들 앞에서도 타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왕세자는 달라야 하고 그래야 왕이 될 자격이 주어지겠지만 일반인의 관점, 아이를 키우는 관점에서 보면 정말이지 몹쓸 아버지이다. 사도세자는 자존감이 생기려야 생길 수 없었을 것이고, 본인이 의도한 것이든 정말로 미쳐버린 것이든 궁인을 살해 하서나 겁탈, 음주가무를 즐기는 등, 망가져 버린다.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굶어 죽게 하는 벌을 내리는데 이게 임오화변이다. 우리나라 역사뿐 아니라 전세계의 역사에서도 정말이지 흔치 않은 비극적 사건이었다. 자격지심과 트라우마의 무서움, 자존감의 중요성이 절실히 느껴진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이 찾아가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자 영조는 세손마저 뒤주에 갖혀 죽게 할 거냐며 역정을 내고는 물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영조 본인에게도 사도세자에게도 정조에게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도 떨어져 지내야 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그렇게 박하게 굴었던 영조가 세손인 정조에게는 역정 한번 내는 적 없이 대했다고 한다. 정조 또한 할아버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목숨 걸고 열심히 했을 것이다.
영화 <역린>은 정조 즉위 후 왕을 시해하려고 시도했던 '정유역변'을 다루고 있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노론 입장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지민이 정순왕후(영조의 부인)로 나오는데 왜 저렇게 젊어? 하겠지만 영조 66세에 맞이한 15세의 왕비이니 당연하다.
정순왕후의 오빠인 경주 김씨 가문의 김귀주(남당)는 외척인 풍산 홍씨 홍봉한(북당)은 서로 견제하는 관계였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나오지만 여러 기록을 보면 정조와 정순왕후의 사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협력관계에 가까웠다.
정순왕후에 관한 일화 중 하나로 영조가 왕비 간택 당시,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꽃이 무엇인지 묻자, 장미나 모란을 말한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백성을 따뜻하게 해주는 '목화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가장 넘기 힘든 고개는 '보릿고개'라고 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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